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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

유전학의 역사

by 노마드K 2023.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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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의 역사

유전학의 역사

 

 

유전학사(遺傳學史)는 히포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및 에피쿠로스에 의한 공헌과 함께 고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은 경험적으로 선사시대부터 생물의 특징이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되는 것을 이용한 품종개량을 해왔다.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한 현대 유전학은 오스트리아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사였던 그레고어 요한 멘델의 연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유전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멘델은 1866년에 완두의 교배 실험에 관한 논문 〈식물 교잡에 관한 실험〉(독일어: Versuche über Pflanzen-Hybriden, 영어: Experiments on Plant Hybridization)을 발표하였는데, 현재는 생명과학 교과서에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정리되어 있다. 실험적인 연구와 함께 수학자들은 집단유전학의 통계적 틀을 개발하여 유전학적 설명을 진화 연구에 도입하였다. 1928년에 프레더릭 그리피스는 폐렴균의 형질전환 실험을 하였고, 1944년에 오즈월드 에이버리는 그리피스의 실험을 훨씬 더 정교하게 설계하여 유전물질이 DNA라는 것을 증명하였지만, 단백질이 유전물질일 것이라는 당시 학계의 강한 믿음 때문에 이 실험 결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2년에 앨프리드 허시와 마사 체이스는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허시와 체이스의 실험을 통해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것을 증명하였고, 학계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멘델의 논문은 발표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1900년에 휴고 드 브리스(네덜란드), 카를 코렌스(독일), 에리히 폰 체르마크(오스트리아)에 의한 "멘델의 재발견" 과정에서 유전학의 기본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1903년에 월터 서턴이 "유전물질은 염색체 위에 존재하며, 염색체를 통해 자손에게 전달된다"는 염색체설을 주장한 이후에 유전학계는 유전물질의 규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5년까지 멘델 유전학의 기본 원리가 다양한 생물체, 특히 초파리(Drosophila melanogaster)에 적용되었다. 1925년에 토머스 헌트 모건과 그의 동료들은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멘델 모델을 더욱 발전시켰다. 다음 몇 년 동안 화학자들은 핵산의 염기 서열 분석 기술과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 분석 기술을 개발했으며, 다른 연구자들은 핵산과 단백질의 관계, 유전 암호를 밝히기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유전자 발현의 조절은 1960년대의 핵심 쟁점이었다. 1970년대에 유전공학을 통해 유전자 발현을 조절하고 조작할 수 있었다. 20세기의 마지막 십년 동안 많은 생물학자들은 전체 유전체(게놈)의 염기 서열을 밝히기 위해 대규모 유전학 프로적트에 초점을 맞추었다. 2003년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료되어 인간의 전체 게놈 지도가 완성되었다. 유전자를 물려받는 기본 패턴이 확립되면서, 많은 생물학자들은 유전자의 물리적 특성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40년대와 1950년대 초의 실험들은 염색체의 한 부분인 DNA에 유전자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1953년에 제임스 D.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이중 나선의 구조를 밝혀내고, 1955년에 프레더릭 생어는 DNA와 아미노산의 관계를 규명하여 유전자 발현 기작을 밝혀내고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을 규명하였다. 바이러스와 세균과 같은 새로운 모델 실험체에 초점을 맞춘 실험들과 그 성과들은 유전학을 분자유전학의 시대로 이끌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신체를 형성하는 요소들이 모여 다음 세대에 유전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물리적인 이데아론 대신에 생물의 형질이 정액(혈액의 정화된 형태로 생각함)과 임신 중인 산모의 생리혈을 통해 자손에게 전달되며, 정액과 생리혈이 생물의 초기 발생을 지시하기 위해 자궁 속에서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보았다.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거의 모든 서구 학자들은 19세기 말까지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개별 종은 고정된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유전되는 변화는 단순히 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전에 대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고대의 이론은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었다. 히포크라테스의 이론(아마도 아낙사고라스의 가르침에 기초를 둔 것으로 추정)은 훗날 찰스 다윈이 제안한 범생설(pangenesis)과 비슷하였다. 식물 육종가들은 많은 중요한 식물 종에서 안정적인 변종을 개발하고 있었다. 19세기 초에 프랑스의 오퀴스탱 사주렛(Augustin Sageret)은 일부 식물 품종을 교배했을 때 부모 중 하나에 나타난 어떤 형질이 보통 자손에게도 나타남을 알아내고 우성의 개념을 확립했고, 또한 부모에게서 발견된 일부 조상 형질이 자손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영국의 존 가턴(John Garton)에 의한 식물 육종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물 육종가들은 그들의 연구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확립하거나 생리학 연구에 그들의 지식을 공유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18세기에 식물과 동물의 다양성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고, 그에 따라 분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유전에 관한 새로운 생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린네를 비롯한 요제프 고트리이프 쾰로이터(Joseph Gottlieb Kölreuter), 칼 프리드리히 폰 거르트너(Carl Friedrich von Gärtner), 샤를 빅토르 노댕(Charles Victor Naudin)과 같은 연구자들은 잡종 형성 특히 종간 잡종에 대한 광범위한 실험을 수행했다. 종간 잡종 연구자들은 잡종 불임 및 여교배(戾交配, backcrossing)의 높은 가변성을 포함하여 다양한 유전 현상을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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