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의 이해 두번째 시간
양자역학 철학적 함의
양자역학을 개발한 이들 중 한 명인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의 무작위성을 좋아하지 않았고, 양자역학의 현상인 도깨비 원격현상 등을 강력히 부정하면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양자역학의 근본에는 보다 깊은 국소적 숨은 변수 이론이 있을 거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에 대해 여러 가지 반박을 제시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EPR 역설이라 불린다. 벨은 EPR 역설을 이용해, 조건법적 명확성(counterfactual definiteness)을 가정한 경우 양자역학과 국소적 이론 사이에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차이가 있음을 증명했다. 실험을 통해서, 실제 세계는 조건법적으로 명확하지 않거나 비 국소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양자역학(量子力學)의 결론들은 당시 과학자(및 일반인)들이 가진 고전 역학적 직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기에, 이 이론이 실재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많은 해석과 철학적 논쟁이 있었다. 영문학 교수이자 작가인 루이스는 비결정론이 그의 철학적 신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양자역학을 불완전한 이론으로 보았다.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존재론적 비결정성이 아닌 인식론적 한계를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다른 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이유에서 숨은 변수 이론을 지지했다. 코펜하겐 해석을 둘러싼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은 당시의 양자역학을 둘러싼 논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많은 수의 물리학자들은 보어 등이 개발한 코펜하겐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해석에서 양자역학의 확률적 측면들은 우리의 지식의 부족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 실재 그 자체이며, 따라서 결정론적 이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
원자와 관련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역학은 ‘파동함수’라고도 하고 ‘상태함수’라고도 하는 수학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파동함수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양자역학적 계의 모든 양자역학적 정보를 담고 있다. 양자역학이 제안된 초창기부터 많은 물리학자는 파동함수의 의미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이에 따라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다시 말하면, 파동함수가 우리가 가진 거시세계에 대한 직관 중 어떤 것에 대응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전까지 물리학에서는 대체로 수학을 이용해 물리학 방정식이나 공식을 만들면, 그 의미는 인간이 경험하는 고시계로부터 얻은 직관과 잘 대응된다고 생각해 왔다. 불과 100여 년 전에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종 라플라스(Pierre Simon de Laplace, 1749~1827)는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개념을 통해, 원칙적으로는 물리학을 통해 물질계의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파동함수와 불확정성 원리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가 원자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 개념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양자역학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파동함수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무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하이젠베르크는 이 양자역학이라는 이론 안에 소위 ‘불확정성 원리’가 있음을 밝혔는데, 이는 입자가 어떤 속도로 어디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특정 시간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가 등을 안다는 것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말해 주었다. 실용적으로 물리현상을 아주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 있는데, 정작 그 이론은 고전적으로 통용되던 우리가 안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양자역학이라는 새 이론은 원자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이론이었다. 학자들은 이 이론을 토대로 점점 더 많은 문제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새로운 이론은 ‘우리가 안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아주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새로 꺼내기 시작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실험할 수 있는 물리학의 혁명적 발전이 실험이 불가능한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을 내포하기도 했다. 물리학은 실제로 20세기 후반부터 지금의 21세기 초반까지 끈 이론, 통일장 이론 등 여러 이론을 내놓았으나 실험이 불가능한 가설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크와 보어의 초기 양자역학은 전자의 궤도가 점프하는 현상을 강조했지만,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전자의 위치가 확률적 분포로밖에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의 양자역학은 원자폭탄, 반도체 등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고 후기의 양자역학은 물질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 큰 변화를 해주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특히 후기 양자역학은 인간의 인식 한계성을 인정함으로써 현대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양자역학의 성립기
양자역학의 형식은 성립되었어도, 그 물리적 해석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예컨대 파동의 개념에 대하여서도 파동역학의 창시자 슈뢰딩거는 이것을 실재(實在)하는 것으로 보았지만 아인슈타인의 반론을 받고, 보름의 확률해석이 이에 대체되었으나, 마침내 이것도 불충분하여 많은 모순으로 유도되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결국 낡은 물리학의 사고방식으로는 양자론의 개념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음이 차차 확실해졌고, 드디어 1927년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등장하였다. 파와 입자의 두 개의 상(像)을 결부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이 관계는, 미시적 세계에서는 일상 경험에서 만들어진 관념은 이미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어는 이 생각을 다시 자연인 방식 일반에 펼쳐 양자역학의 일관된 해석을 수립하려고 하여, 같은 해 상호보완성 원리를 제창하였다. 현상의 시공적(時空的)인 기술과 인과적 관계와는 서로 보충하는 동시, 서로 배제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은 다른 관점에서 출발하였고, 전혀 다른 형태를 갖추고 형성되었으나, 그 이룩한 결과는 일치했다. 이것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에르빈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에서 행렬역학의 유도를 시도하여 양자의 동등성(同等性)을 증명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와 같은 새로운 양자론의 해석에 찬성하지 않고 일관하여 EPR 역설 등 의문을 계속 제출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기묘한 양자역학의 주장은 당시의 사상계에도 큰 영향을 주어, 물질의 부정이나 주관주의·실증주의 경향의 세력이 향상하는 기초가 되기도 하였다. 폴 디랙과 파스코 알 요르단(Pascual Jordan)은 변환이론(變換理論)을 수립하였으며, 이것으로 두 개의 이론은 하나로 통합되어 1926년경에는 양자역학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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